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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연예포커스

나훈아 김지미 결혼 당시 사진/헤어지게 된 이유/나훈아 프로필 히트곡/라이벌 남진과의 관계

by 스위티77 2023. 8. 28.

자타공인 1970년대 한국 가요계의 아이콘이자 라이벌인 남진과 함께 한 시대를 양분한 슈퍼스타로 대한민국 가요계 역사상 최고의 가수로 손꼽히는 나훈아

 

◈나훈아는 히트곡만 무려 120곡이 넘어 가황 이라는 단어를 뛰어 넘어 히트곡 제조기로 불린다

 

◈이는 국내 최다를 기록했고, 앨범 발매만 해도 200장 이상이며, 자작곡 800곡 이상을 포함해서 총 2,600곡 정도를 취입했다

 

◈이 기록은 아마 지금도, 앞으로도 깨지기 힘든 기록이 될 것이다

 

 

1947년생으로 올해 나이 76세인 나훈아는 나이를 먹을수록 더 멋있어진다

 

 

[나훈아의 프로필]

  • 출생:1947.2.11 부산시 초량동
  • 본명:최홍기
  • 현 거주지:경기도 양평군/서울 용산구 한남도
  • 키:175cm/몸무게:71kg
  • 가족:어머니, 아들,딸
  • 학력:부산 초량국민학교/부산 대동중학교/서라벌예고
  • 병역:공군 병장 만기전역
  • 데뷔:1968년 노래 '내 사랑'

 

나훈아의 나이는 호적상으로는 1951년생이지만 가요계에선 1947년생으로 알려져 있다. 워낙 어린 시절에 데뷔를 해서 남에게 얕잡아 보일까봐 나이를 몇 살 올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만 해도 남자들은 사회에서 자신의 실제 나이보다 몇 살 올리는 관행이 있었다..

또한 1945년생인 남진과 라이벌 구도를 만들기 위해 나훈아를 47년생으로 끌어올리지 않았겠느냐 하는 설이 꽤 유력하다. 본인이 이에 관한 설명이 없어서 추측만 할 뿐이다

 

[[나훈아는 중학교 시절 야구 선수였다]]
◈나훈아가 대동중학교 다니던 시절 야구를 했는데 , 유명한 허구연 야구해설위원이 2013년 박경림이 진행하는 MBC FM4U,2시의 데이트에 출연해서 나훈아에 대한 언급을 했다

◈"중학교 때 나훈아가 야구선수로 뛰었는데 나는 부산 경남중학교 선수였다. 나훈아가 장기자랑을 할 때 노래를 정말 잘 불렀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말했다

◈중학교 선배인 이희수(빙그레-한화 이글스 선수 출신)감독도 나훈아가 당시 빼어난 실력을 가진 내야수였다고 기억을 했다

 

 

 

 

[나훈아의 데뷔 스토리]

◈프로필 상으로는 데뷔 연도가 1968년으로 표기됐지만, 1966년에 '천리길'을 발표하며 데뷔했다는 설도 있다. '천리길'의 실물 음반은 확인이 안된다

 

◈2020년 KBS에서 진행한 단독 콘서트를 준비하면서 본인이 가수생활 54년이라고 언급을 한 것으로 보아 1966년을 데뷔 연도로 봐야할 것 같다

 

 

[나훈아의 노래 창법]

◈나훈아의 창법은 묵직하고 중후함이 느껴지는 저음과 특유의 절묘한 고음, 이를 활용하면서 나오는 전매 특허인 꺾기로 대표된다

 

◈이러한 창법은 가요계에 선을 보이자마나 엄청난 충격을 안겼으며, 수많은 가짜 나훈아를 양성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나훈아의 노래는 유달리 자기만의 색을 입혀서 노래하기 때문에 다른 가수가 나훈아의 노래를 소화하다 보면 자칫 어설픈 모창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나훈아의 히트곡 대부분은 자신이 직접 작사 작곡한 곡이다. 하지만 2005년에 발표한 '고장난 벽시계'는 윤중민 작사, 박성훈 작곡으로 본인이 만든 곡이 아니다

 

나훈아가 다른 가수에게 준 곡
*땡벌:강진
*당신의 의미:이자연
*여자이니까:심수봉

 

◈나훈아는 가창력 만큼이나 자타가 공인하는 무대 장악력을 가졌다. 나훈아만이 가진 카리스마로 무대를 압도하는 퍼포먼스와 무대연출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콘서트에서 한 팔만 들면 자기가 작사 또는 작곡한 노래이고, 작사와 작곡을 직접 한 노래를 부를 때는 양팔을 위로 올리는 퍼포먼스를 취한다

 

 

젊은 시절의 나훈아 모습

 

[나훈아의 히트곡]

◈사랑/영영(데뷔 25주년 기념 앨범 타이틀곡)/울긴 왜 울어/잡초/무시로/고향역/공/물레방아 도는데/대동강 편지/갈무리/홍시/애정이 꽃피던 시절/사랑은 눈물의 씨앗/너와 나의 고향/머나먼 고향/강촌에 살고 싶네/해변의 여인/어매/감나무 골/인생길 나그네길/가라지/사내/모르고/18세 순이/건배/모정의 세월/고장난 벽시계/땡벌/녹슬은 기찻길/평양 아줌마/청춘을 돌려다오/고향으로 가는 배/팔자/불길/가지마오/님 그리워/남자의 인생/몰라/아이라예/찻집의 고독/아리수/아담과 이브처럼/낙엽이 가는 길/내 삶을 눈물로 채워도/세월 베고 길게 누운 구름 한 조각/오로라/꿈속의 고향/한백년/행복을 비는 마음/후회/공항의 두 얼굴/자네/테스형/명자/체인지/기장 갈매기

 

 

[남진과의 라이벌 구도]

◈남진과 나훈아는 1970년대부터 라이벌로 경쟁했고, 팬덤도 확연하게 갈라졌다. 언론이나 대중들도 두 가수를 라이벌 구도로 만들기 딱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남진은 곱상한 외모에 호방한 목소리로 대중성이 강했고, 나훈아는 상대적으로 외모가 남성적이었으나 싱어송라이터로 음악성을 어필하는 느낌이 강했다

 

◈두 사람의 출신지도 대조적이었는데 남진은 전남 목포의 갑부 집안 출신이었고, 나훈아는 부산 출신으로 아버지가 무역선 선원이어서 비교적 넉넉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남진 집안에 비하면 서민에 속한 편이었다. 팬덤도 영남과 호남으로 극명하게 나뉘게 된 계기가 됐다

 

웃기는 일화가 있는데, 두사람의 상반된 외모 차이와 분위기로 인해 양쪽 팬덤에서도 엄청난 라이벌 대립각이 형성돼 공연장에 가면 남진 팬들은 나훈아에게 '소 도둑놈  저리가라'고 외쳤고, 나훈아 팬들은 남진에게 '돼지 멱 따는 소리 치워라'라고 외치며 싸우는 모습이 연출됐다

 

[남진과 나훈아의 영화 공동 출연]

◈1973년 '어머님 생전에' 영화에 나란히 출연했다. 이 시기에는 남진의 인기가 좀 더 많았지만 나훈아가 후에 가창력으로 부각되면 라이벌로 불리게 됐다

 

◈그 후 나훈아는 예술적인 곡을 많이 작곡하면서 가수, 예술가로서의 자리를 확고히 다지게 된다

 

 

 

[스토커의 공격으로 얼굴이 찔려 72바늘을 꿰맸다]

◈1972년 6월 4일, 어느 스토커 같은 사람이 사이다 병 파편으로 나훈아의 왼쪽 얼굴을 찔렀고 이 사고로 나훈아는 72바늘을 꿰매야 했고 지금도 흉터가 남아있다

 

◈당시 목격자인 이상벽 씨의 증언에 의하면 괴한이 처음 난입했을 때는 무대에서 싸우는 퍼포먼스인줄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유혈사태가 일어나자 사태 파악을 해서 괴한을 제압했다고.

 

◈이 사건을 남진 측에서 사주를 했다는 소문이 돌아서 한동안 논란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수사결과 남진이 관련됐다는 증거는 없었다고 한다

 

 

[가수 강진의 0번 째 은인이 된 사연]

◈강진은 가수로 데뷔하고 히트곡이 없어 고전했는데 그의 아내가 '땡벌'을 이야기 했고, 강진도 곡이 마음에 들어서 나훈아를 직접 찾아가 "저에게 이 곡을 주시면 유명한 가수가 되어보겠다"고 부탁을 했다

 

◈나훈아는 강진에게 노래를 불러서 보내봐라고 했고 강진의 노래를 들은 나훈아는 강진에게 맞도록 멜로디와 가사를 수정하고 편곡해서 줬다고 한다. 나훈아는 강진에게 편곡 비용도 안 받고 작업실로 불러서 가이드를 해주며 녹음을 해줬다는 미담이 있다

 

 

 

[김지미와 결혼, 그리고 이혼]

 

◈1976년 7월 결혼선언을 하는 나훈아와 김지미의 사진이 신문에 실렸다. 당시만 해도 여자가 연상 그것도 7살이나 연상인 점은 사회 전체가 충격을 받을 정도로 파격적인 행보였다

 

◈더군다나 한번의 결혼과 이혼 전력이 있는 김지미는 나훈아보다 나이도 많아서 떳떳하게 나서는 입장이 되지 못했다. 지금으로선 상상도 못할 옛날 이야기다

 

◈두 사람은 결혼선언을 했지만 결혼식은 생략하고 사실혼 상태로 6년을 지내다가 공식적으로 1982년 5월 이혼을 발표하며 헤어졌다

 

◈나훈아는 훗날 "김지미는 나를 남자고 만들어준 사람"이라고 평했고, 김지미는 "진정 남편으로 믿고 의지할 남자였다"고 말했다. 나훈아는 김지미와 헤어지면서 수천만원의 돈을 건넸는데, 여자는 혼자 살려면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했다는데 정말 남자 중의 상남자다

 

◈나훈아는 김지미와 헤어진 후 가수 정수경과 동거를 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과 딸이 있다

 

 

김지미의 젊은 시절 풋풋한 모습
2017년 이장호 영화감독과 함께(좌측 사진)/ 배우 전도연의 손을 잡고 계단을 오르는 김지미(우측 사진)
지금은 고인이 된 강수연 배우와 함께 입장하는 김지미

 

[예술가의 자존심을 지킨 나훈아]

◈2018년 남북평화 협력기원 남측예술단 평양공연 때 북한에서 나훈아의 참석을 요구했던 것이 나중에 밝혀졌다. 김정은이 도종환에게 나훈아는 안왔냐고 묻자 도종환이 스케줄 때문에 못 왔다고 대답했는데 이에 김정은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2022년 6월 나훈아는 콘서트 중에 자기 노래는 다 서정적인데 고모부(장성택)를 처형하고, 이복형(김정남)을 암살하고, 회의 때 존다고 사람(현영철) 죽이는 뚱땡이 살인마 앞에서 사랑 노래가 어떻게 나오냐고 김정은을 정면으로 디스했다.

 

◈김정은 옆에 있으면 노래가 아니라 귓방망이 날리는 것 밖에 못한다고 말하는 패기를 보여주었다

 

◈나훈아의 이런 점이 너무 멋지다! 어느 누가 감히 저렇게 통쾌하게 북한의 뚱땡이 김정은을 향해 한 방 시원하게 날릴 수가 있겠는가?  당시 가왕이라 불리던 조용필은 냅다 북한으로 가서 자기보다 한참이나 어린 김정은앞에서 90도 폴더 인사를 올려서 빈축을 산 일이 있다.

 

◈조용필의 비굴함과 비교되는 나훈아의 걸출한 행동은 그를 더 돋보이게 하는 일화였다

 

[노래방 책에 가장 많은 곡을 올린 가수]

◈나훈아는 노래방 책에 가장 많은 곡을 올린 가수 1위를 차지한다. 덕분에 지금도 들어오는 저작권료는 월 5,000만원에서 1억원이 된다고 한다